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Great Smoky Mountains Nationa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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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스모키 마운틴의 역사와 체로키 인디언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스모키마운틴이 자리잡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서부지역에서 산악지대가 형성된 것은 10억년 전 이전이라고 한다. 이당시 지층의 융기로 인해 수천 피트의 암석층이 지표면으로 돌출하면서 현재의 아팔레치안 산맥과 블루리지를 형성했고 이 과정에서 남동쪽에 현재의 스모키 마운틴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빙하기를 거쳐 아시아에서 베링해협을 건너온 구석기인들이 처음 이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12,000년 전 이곳에 살던 인간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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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키 마운틴은 원래 조지아 남동부를 생활 근거지로 삼았던 체로키 인디언들의 활동무대였다. 하지만 1540년 플로리다 북부에서 시작해 금을 찾아 이곳까지 찾아온 헤르나도 데 소토(Hernado de Soto)와 그의 부하들 이후 백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졌으며 18세기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특히  1818년 무렵부터는 테네시 북동부의 와타우가 정착지 출신의 백인들이 스모키 마운틴의 서쪽에 위치한 카데스 코브(Cades Cove)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스모키 마운틴은
연기처럼 푸르다는 뜻을 가진 샤코나게(Shaconage)라는 체로키 인디언식 이름으로 불려졌고 카데스 코브 또한 민물 수달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치야하이(Tsiyahi)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현재 카데스 코브 안내소가 자리잡고 있는 카데스 코브 지역은 체로키 인디언식 이름처럼 수달 외에도 사슴과 들소들의 서식지였는데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이곳에 정착하기 전부터 이미 씨를 말릴 정도로 백인 사냥꾼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카데스 코브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이곳을 여름 사냥터로 이용하곤 했던 체로키 인디언들이 이들을 반길 리 만무한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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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이전까지 정착민들과 별로 좋은 사이를 유지하지 못했던 체로키 인디언들은 영국군에 협력해 자신들의 땅에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정착민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영국군이 패배하고 물러간 이후 체로키 인디언들은 새로 수립된 미합중국과 친선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독립전쟁 이전에도 이들은 이미
개화된 5개의 부족(five civilized tribes) 중의 하나로 불릴 만큼 유럽의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문화와 융합을 시켜나가고 있었다. 현대식 건물을 세웠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냈으며 1809년부터는 독일계 유랑인과 체로키 인디언 사이에서 태어난 세쿠오야(Sequoyah, 아래 사진)라는 천재에 의해 만들어진 체로키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맹이었던 세쿠오야는 백인들의 세계에서 체로키 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명의 핵심이 문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체로키 인디언들의 말을 표기하기 위한 86개의 음절문자표를 만들어냄으로 체로키인디언들이 서구문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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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이들은 근처에 정착한 백인들보다 훨씬 낮은 문맹율을 자랑했고 1828년부터 영어와 세쿠오야를 섞어 체로키 피닉스라는 신문을 찍어내기 시작하면서 다른 인디안 부족들에 비해 엄청나게 선진화된 모습을 갖춰나갔다. 이들은 특이하게도 백인들처럼 흑인노예를 부리기도 했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성경과 찬송을 부족어로 번역해 암송하기도 했다고 한다. 183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1,000명 이상의 흑인노예들이 체로키 부족의 대농장에서 일하고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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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키 인디언들의 동화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국인들은 모든 인디언들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몰아내고 싶어했다. 그러던 중 조지아주의 워드(Ward) 계곡에 살던 체로키 인디언 소년이 가지고 놀던 금덩이를 백인 장사꾼에게 팔면서 체로키 인디언들에게 비극의 그림자가 닥치기 시작했다. 체로키 인디언들의 거주지에 금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백인들은 그들을 몰아내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먼저 조지아 의회가 체로키 부족의 땅을 몰수하기 위해 체로키 부동산 몰수법을 통과시켰고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앤드류 잭슨 대통령(제 7대 대통령으로 10달러 지폐를 장식하고 있는 인물이다)이 취임과 함께 인디언 강제 이주법안이 의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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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체로키 인디언들은 개화된 부족답게 법적 절차를 밟아 연방 대법원에 위헌 심판을 청구했다. 그리고 이들을 돕던 선교사 새무엘 워체스터 목사가 조지아 주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1832년 연방 대법원은 워체스터 목사를 구속한 근거가 된 조지아주의 체로키 부동산 몰수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건국 초기 불안정했던 미합중국의 법체계를 바로 세운 존 마샬 대법원장의 이 판결은 한때나마 약자였던 체로키 인디언들의 권리가 미합중국의 헌법에 의해 보호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난한 개척민의 아들이었던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는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했다. 위헌 판결이 난지 1년이 지나도록 워체스터 목사가 석방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1837년 5월 윈필드 스콧 장군이 이끄는 7천명의 기병대는 조지아주 뉴 에코타에 모여 살던 체로키 부족을 포위하고 1만 6천명의 체로키 인디언들을 임시 수용소에 강제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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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듬해 14,000명의 체로키 인디언들은 아팔래치안 산맥을 넘어 이후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 불리게 되는 1,000 마일의 거리를 지나 인디안 영토로 불리던 오클라호마주의 탈레쿠아(Tahlequah; 이곳에는 지금도 체로키국의 수도가 자리잡고 있다)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하필이면 추위가 시작되는 10월부터 이주가 시작되어 1839년 3월 26일 탈레쿠아에 도착하기까지 5개월 동안 겨울의 강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인해 1/4 이상인 4천명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험난한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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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된 인디안 부족이 비문명적(?)인 방식에 의해 대량학살을 당하는 동안 소수의 체로키 인디언들은 이주를 거부하고 스모키 마운틴으로 숨어들었다. 강제이주에 순응했던 체로키 인디언들(웨스턴 밴드)과 구별하기 위해 이스턴 밴드(Eastern Band)라고 불렸는 이들은 미군과 정착민들의 눈을 피해 야생의 삶을 살아가다 1870년대 미정부에 의해 노스 캐롤라이나 서쪽의 콸라(Qualla) 지역에 정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노스캐롤라이나 쪽 공원입구에 자리잡은 체로키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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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대지를 무대로 사냥과 농업을 하며 살아가던 체로키 인디언들은 이제 제한된 보호구역에서 관광과 카지노 사업으로 연명하는 처지다. 미국의 다양한 인종 중 가장 열악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디언들의 애환은 1971년 2월에 그룹 레이더스가 불러 같은해 9월에는

빌보드 1위까지 올랐던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곡에 잘 드러난다.

 

Indian Reservation Raiders

 

They took the whole Cherokee nation(옛 체로키 인디안 전체를 빼앗아 버리고)

Put us on this reservation.(우리를 보호구역이라는 이곳에 몰아 넣었지)

Took away our ways of life.(자랑스런 우리의 고유 생활방식...)

The tomahawk and the bow and knife.(도끼와 , 그리고 칼마져 빼앗아 버린 뒤)

Took away our native tongue.(결국은 우리의 언어마져 없애 버리고)

And taught their English to our young.(우리의 자녀들에게 자기네 영어를 가르치다니...)

 

And all the beads we made by hand(내 조상이 직접 손으로 만들었던 모든 구슬 목거리는)

Are nowadays made in Japan.(모두 일본에서 들여 온다네--요즘은 메이드인 챠이나...)

 

Cherokee people, Cherokee tribe(체로키 사람들이여, 체로키 국민이여~)

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살아서도 자랑스럽고, 그렇게 자랑스럽게 죽어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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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y took the whole Indian nation(그들은 모든 인디언의 땅을 빼앗아 버리고)

Locked us on this reservation(우리를 보호구역에 가둬 버렸다네.)

Though I wear a shirt and tie(나는 어쩔수없는 와이셔츠에타이를 매지만)

I still part red man deep inside!(그래도 내 몸속에는 인디안의 뜨거운 피가 흐른다네!)

 

Cherokee people, Cherokee tribe(사랑하는 내 민족 체로키여~)

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살아있던 또는 죽더라도 영광스런 자존심을 가져야지.)

 

But maybe someday when they learn(언젠가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 날)

Cherokee nation will return, will return,(광영의 체로키는 다시 돌아 온다네.)

will return, will return, will return.(반드시, 반드시 되 돌아 올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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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카데스 코브의 초기 정착민들

 

체로키 인디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한 후 카데스 코브와 지역의 정착민들은 아무 걱정 없이 이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됐다. 1850년에는 685명의 거주민들이 석회암으로 이뤄진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금맥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농사만큼 금맥찾는 일은 신통치가 않았다. 남북전쟁이 일어나면서 이 지역도 혼란에 휩싸였다. 지역은 남부에 속했지만 노예나 노예주가 없었지만 문화적으로 남부에 아무 연관이 없었던 이 지역의 젊은이들 중 21명이 북부연맹에 지원했고(12명은 남부연합을 위해 싸웠다) 나머지 주민들도 대부분 친북부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주변 지역이 모두 남부연합 세력이었기 때문에 1862년에서 1864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던 남부연합군은 가축을 훔쳐가거나 주민들을 잡아가는 등 거주민들을 괴롭혔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이에 맞서 아이들에게 산꼭대기에서 망을 보다 남부군이 접근하면 신호를 보내도록 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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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해방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으로 갈라진 미국의 비극이 이 작은 지역에서도 축약되어 나타났다. 가장 유명한 비극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총을 겨누고 싸워야 했던 러셀 그레고리와 찰스 그레고리의 이야기다. 북부연맹의 적극 지지자였던 아버지 러셀은 아들 찰스가 남부연합군에 지원한 이후 계속되는 남부군의 침입에 맞서 기습부대를 조직한다. 어느날 러셀의 부대가 남부연합군을 공격해 이들을 퇴각시킬 때 남부군에 속해있던 아들 찰스가 아버지 러셀이 부대를 이끄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부대장에게 보고한다. 그날 저녁 마을을 습격한 남부군은 찰스가 지목한 저항군대의 대장 찰스를 체포해 현장에서 사살한다. 러셀은 마을 지킨 순교자로 추앙받았고 그의 묘비에는 노스 캐롤라이나의 반역자들에게 살해당한 러셀 그레고리라는 비문이 적히게 됐다. 동료들이 아버지를 죽을 줄 모르고 신고했던 찰스는 전쟁 후 마을 주민들로부터 조금씩 용서를 받게 됐고, 죽은 후 프리미티브 침례교회 묘지에 묻힌 아버지의 무덤 뒤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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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기간 중  남부연합군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지만 북부연맹군에 의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던 카데스 코브 지역의 정착민들은 이후 외부인을 신뢰하지도 환영하지도 않은 채 고립된 삶을 살아갔다. 외부에서의 이주도 중단됐고 작은 공동체 안에서 혼인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1900년까지 700여명의 주민 대부분이 친척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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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스 코브 지역이 다시 외부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00년 무렵 일어난 벌채산업 때문이었다. 풍부한 삼림지역인 스모키 마운틴으로 벌목업자들이 몰려들었고 이 지역 주민들도 벌목에 동원되어 연방정부의 화폐가 이 지역에 유입됐다. 스모키 마운틴에서 벌어진 대규모 벌목으로 인해 스스로 고립을 자처했던 카데스 코브 지역이 외부와 교류하는 계기가 됐지만 이로 인해 주변의 환경이 급속히 파괴되는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1900년 이후 30년 동안 미래의 국립공원에 있던 나무 중 2/3가 벌목을 당할 정도였다니 그 훼손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벌목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1920년대에 스모키 마운틴을 국립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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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 조성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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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키 마운틴을 국립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움직임은 1923년 낙스빌에 거주하던 윌리스 데이비스 여사가 서부지역의 국립공원들을 방문한 뒤 자신이 살고있는 지역 근처의 스모키 마운틴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이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는데 가장 큰 쟁점은 누가 토지를 매입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외에 국립공원안과 국유림(National Forest)안에 대해서도 지역 정치인들이 논쟁을 벌였다. 노스 캐로라이나와 테네시주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국립공원안을 지지했는데 그 이유는 스모키 마운틴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음에도 국립공원 자체보다는 낙스빌과 애쉬빌 사이의 포장도로가 건설되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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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오랜 시간 동안 진통을 거듭하던 이 논쟁은 데이빗 쳅맨 대령이라는 지역 유지가 국립공원안을 지지하면서 해결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방정부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스모키 마운틴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 이미 60개의 국립공원 후보지들이 연방정부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고(결국 스모키 마운틴은 60개 이상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셈이다) 1926년 의회의 승인을 받기 전까지 연방정부는 스모키 마운틴 지역의 토지매입을 위한 자금을 지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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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반 국립공원화 움직임이 일어나자 카데스 코브 지역 주민들 중 절반은 자신들의 땅을 파는 것에 찬성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이를 거부했다. 카데스 코브 최초의 정착민의 증손자였던 존 올리브는 테네시 주정부에 맞서 정착지 불매운동을 주도하면서 이 문제를 연방 대법원까지 끌고 가 거주민들이 종신임대계약을 통해 자신들의 거주지에 계속 머물러도 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 판결의 결과로 자신들의 땅을 팔았지만 다시 임대를 해 원하는 동안까지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있게 됐고 그들 중 한 가족은 아직까지도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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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이후 공원위원회는 새로운 국립공원 조성에 필요한 6천 6백 개의 구역의 토지를 매입하기 위한 기금 조성을 추진했고 스모키 마운틴이라는 이름 앞에 형용사 Great를 추가했다. 초등학교 학생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페니부터 고액기부자가 낸 수천달러에 이르기까지 공원위원회는 250만 달러의 기부금을 약정받았고 노스 캐롤라이나와 테네시 주민들로부터 250만 달러의 자금이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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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일어난 대공황으로 인해 토지가격이 폭등해 자금이 더욱 필요해진 반면 약정된 기부금을 받기도 점점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위원회는 추가자금 마련을 위해 필사적으로 의회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는데 이때 마침 록펠러 가문이 무려 5백만 달러의 후원금을 지원해 공원부지 조성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뉴 파운드 갭에 세워진 기념비는 이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아래 사진). 1933년 연방정부도 155만 달러를 추가 지원해 공원부지 조성에 도움을 줬다. 그리고 토지구입 자금 마련 외에도 토지가격 상승으로 인한 이익을 노리는 일부 토지주들의 욕심과 사유권 침해 문제 등 어려움 속에서 필요한 땅의 절반 가량이 매입된 후 국립공원 건설의 주도권은 연방정부에게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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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의회는 1934년 6월 15일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지역에 새로운 국립공원을 설립할 것을 의결했고 이후 국립공원 관리국이 국립공원 조성을 위한 토지매입을 계속하는 가운데 1940년 9월 2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공식 지정했다. 2000년 9월 23일 현재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은 국유지 52만 976. 6에이커, 비국유지 644. 5에이커 등 총 52만 1, 621에이커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매년 9백만명 가까운 방문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 이 공원에는 북유럽 전체보다 많은 종류의 나무들을 비롯해 1,500종의 식물 및 수십 종의 어류, 60여종의 조류와 포유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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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3-16 22:07:57 아틀란타 (GA) 여행 정보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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